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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스토리&차소서&차소설

80년 역사 독일산 딱정벌레, 폭스바겐 비틀 이야기

근 비틀을 전기차 모델로 부활시킬 계획이 없음을 공식 발표한 폭스바겐은 사실상 단종 수순을 밟게 되었다. 딱정벌레 같은 독특한 디자인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비틀이 자동차 역사에서 마침표를 찍게 될 예정이라 하니 아쉬울 따름이다. 

 

20세기, 21세기 두 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발이 된 폭스바겐 비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포르쉐라 가능한 비틀

1세대 (1938~2003)



비싼 고급 모델만 있다 보니 서민들은 차량 구매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폭스바겐 비틀은 대중들을 위한 자동차로 개발된, 어찌 보면 자동차 역사의 혁신이다. 193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독일 내 자동차 산업은 고급 모델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때문에 일반 가정집에서는 자동차를 구매할 여력이 없었고, 대신 오토바이를 이동 수단으로 사용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당시 자동차 소유 비율은 50명 당 1명꼴로, 2%의 인구만이 자동차를 소유할 재력을 가졌다.



1934년 독일의 히틀러는 포르쉐 창립자이자 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4가지 요건을 제시하며 자동차 생산을 의뢰했다. 당시 히틀러가 언급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KdF 캠페인의 가족 단위인 성인 2명 어린이 3명을 태울 수 있는 공간.


** KdF는 ‘Kraft durch Freude’의 약자로 즐거움을 통한 힘(Strength through Joy)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국영 여가 단체다. 주요 역할로 나치즘(국민 사회주의)를 적극 홍보하고 서민층과 중산층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콘서트, 연극, 독서, 여행 등을 장려했다.


100km/h로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는 출력


1,000 마르크(70만 원) 가격대로 저렴하고 튼튼한 가성비. 800


독일의 혹독한 겨울 기후에 맞는 엔진 탑재.


개발자 입장에서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잘 달리고 온 가족이 탈 수 있는 넉넉한 공간에 튼튼한 차량을 아주 값싸게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5~7인승 공간에 200마력 출력을 갖춘 튼튼한 차량을 경차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으라는 이야기와 같다.



1938년, 포르쉐는 4년 만에 난제를 해결해 서민차 ‘비틀’을 완성한다. 출시 당시 비틀의 이름은 ‘카데프 바겐(KdF Wagen)’으로, ‘비틀’이란 명칭은 1967년 미국 수출 이후 사용되었다.

 

사실 포르쉐는 카데프 바겐이라는 이름 보다 ‘국민들의 자동차’를 뜻하는 ‘폭스바겐(Volkswagen)’으로 부르길 원했다고 한다.



비틀의 성능은 출시 당시 기준으로 준수했다. 1.1L 4기통 수평대향 엔진을 얹어 34마력에 최고속도 98km/h를 기록했다. 그리고 연비는 15km/L 정도다. 


히틀러는 비틀이 마음에 든 나머지 각종 행사에 등장시키거나 각계 인사들에게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고.

 

특히 비틀의 둥근 루프 디자인은 공기저항 계수를 0.41cd까지 낮추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공차 중량을 낮추기 위해 엔진, 변속기 등은 모두 경량 합금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기술력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비틀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군용으로 일부가 생산되었다. 오프로드에서도 주행 가능하도록 4륜 구동 섀시와 전용 타이어들이 적용되었다. 특히 RR로 제작된 탓에 엔진이 뒤에 위치해 적군의 공격을 받아도 차량이 퍼지는 일이 없어 유용했다고 한다. 이 시기 포르쉐는 비틀에 이어 전차까지 설계하다 전범으로 낙인 찍혀 20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전후에는 비틀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어려워진 경제사정 탓에 값싸고 튼튼하며 준수한 성능을 갖춘 비틀이 필수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았기 때문이다.



비틀은 수출 실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 미국으로 수출되면서 실적 증가를 이루었고, 아일랜드, 영국, 일본, 베트남, 브라질, 멕시코, 호주, 남아공 등 전 세계로 수출 및 현지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단종 시기인 2003년까지 2,152만여 대라는 놀라운 판매 기록을 세우게 된다.

 

비틀은 50년대, 60년대, 70년대를 거치며 디자인 및 성능이 조금씩 변경되기는 했지만, 거의 첫 모델과 비슷할 만큼 한결같은 모델이었다.



2003년에는 단종을 기념하는 ‘라스트 에디션’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비틀은 전 세계인들의 발이 될 정도로 많이 판매된 만큼 글로벌 문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히피들의 상징이 되었는데, 당시 미국의 크고 우람한 차량과는 정 반대인 작고 아담한 디자인 덕분에 미국의 과소비 문화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극적인 예술의 한 형태인 ‘사이키델릭아트’와 연결되면서 비틀의 외관이 캔버스가 되어 개성 넘치는 디자인으로 도로를 누비기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아들 비틀 뉴 비틀

2세대(1997~2011)



폭스바겐은 1세대 비틀의 명성을 이은 2세대 비틀인 ‘뉴 비틀’을 출시한다. 첫 등장은 1994년 북미 국제 오토쇼로, 복고풍 콘셉트카 ‘Concept One’으로 공개되었다. 정식 출시에는 폭스바겐 골프 4세대 PQ34 플랫폼을 기반으로 겉모습만 비틀과 유사하며 내부는 시대에 맞게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디자인은 이전 세대를 계승함과 동시에 좀 더 둥글고 심플한 형태로 변경되었다. 덕분에 비틀 특유의 감성을 유지하되 세련된 느낌이 강해졌으며 일반 차량과는 다른 특이한 디자인 덕분에 하피에 이어 ‘여피 (YUPIE)’의 상징이 되었다. 참고로, 여피는 미국 뉴욕 등을 무대로 출퇴근을 하는 25~45세 지적 종사자들을 의미한다. 

 

1997년부터 2011년 단종까지 18종의 엔진들이 적용되었는데, 골프 4세대와 플랫폼을 공유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성능은 1998년도 1.9 TDI 기준 89마력 20.7kg.m다. 


그리고 3.2RSI를 기준으로 하면 222마력 33.1 kg.m다. RSI는 뉴 비틀의 특별버전으로, 일부 부분이 탄소섬유가 적용되었으며 4륜 구동 시스템 등 많은 부분이 주행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변경되었다.



2006년에는 페이스리프트가 진행되었으나 별반 차이가 없어 마니아가 아니라면 잘 모르는 수준이다. 뉴 비틀은 1세대 비틀처럼 독특함을 무기로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명성을 떨쳤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 더 비틀

3세대 (2011~2018)



뉴 비틀에 이어 더 비틀이 2011년 풀 모델 체인지로 다시 등장했다. 첫 공개는 상하이 모터쇼로, 폭스바겐 골프 5세대, 폭스바겐 제타, 아우디 A3 등과 동일한 PQ35 플랫폼이 적용되었다. 디자인은 이전 세대에 비해 좀 더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조되었으며, 일각에서는 포르쉐와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는 의견까지 있었다.

 

성능은 디젤 기준 2.0L 디젤 직분사 엔진을 얹어 140마력, 32.6kg.m를 기록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판매량은 저조했다. 디자인은 특별하지만, 평범한 내부와 성능이 고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폭스바겐 골프가 있었기 때문에 “비틀 대신 골프를 사겠다.”라는 소비자들의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디젤 게이트로 인해 폭스바겐이 재정난에 빠지면서 인기 모델 외 나머지 모델들을 단종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 단종설이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한편 폭스바겐이 전기차 콘셉트카 시리즈인 ‘I.D.’를 내놓으면서 마이크로버스 등이 부활할 조짐을 보였고, 이러한 흐름에 편승해 비틀 또한 단종 위기설에서 자유로워 지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폭스바겐은 신모델 출시 계획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면서 비틀은 사실상 단종 수순을 밟게 되었다.

 

향후 폭스바겐의 클래식 모델을 담당하게 될 차종은 마이크로버스 리뉴얼 버전인 ‘I.D. BUZZ’로, 2020년 출시될 계획이다.

  

마치며...



작고 귀여운 딱정벌레 비틀은 1938년 태어나 2018년까지 80년 차생을 살아왔다. 1세대 만인의 자동차로 시작해 히피 여피 등 새로운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오늘날 예전만큼의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수 십 년 동안 쌓아온 명성만큼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비틀을 사람으로 치자면, 80세 고령의 나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함께 한 만큼, 아마 “썩 괜찮은 인생이었다!”하며 나름 만족스러워하고 있지 않을까?